빛의 제국
2017.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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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 우리가 감정에 일일이 어떤 표식을 부착할 수 있다면 누군가는 그 순간의 그의 감정을 '너무 일찍 도착한 향수(鄕愁)'라 명명했을 것이다. -p.55
- "애들이 동물원에서 원숭이들한테 돌을 던지고 애견센터 진열장을 주먹으로 쳐서 강아지들을 놀라게 하는 건, 사실은 대화를 하고 싶어서라더군요. 반응이 없으니가 아이들이 지들 방식으로 말을 건네는 거랍니다." -p.79
- 그보다는 장마철의 큰물, 그리고 함께 휩쓸려 떠내려오는 것들 ; 허우적대는 황소, 자개장롱의 문짝, 임신한 버크셔 암퇘지, 벌겋게 들끓는 흙탕물의 거품, 벌목된 리기다소나무의 가지, 성급한 등산객의 사체, 스티로폼 부표를 망라하는 그 모든 것들의 흐름에 더 가까웠다. -p.93
- 속물이 속물인 것을 감추려면 쿨할 수밖에 없다. 쿨과 냉소가 없다면 그들의 속물성은 금세 무자비한 햇빛 아래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 -p.112
- 그는 젊고 앞으로도 한동안 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늙어가고 있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p.157
- 아니, 종로의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 또한 낯설었다. 종로는 처음에도 낯설지 않았고 이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거리였다. 그곳은 서울의 중심이지만 어쩐지 늘 변방 같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서울다웠다. -p.168
- 만약 이 세계에 기독교라는 곳에서 말하는 연옥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바로 그곳일 것이다. 그들은 피안도 차안도 아닌 점이지대에서 아무것도 절박할 것이 없는 삶을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p.174
- 고등학교 시절엔 그렇게 공부를 잘해서 온 학교의 선생님들한테 귀염을 받던 내가 왜 그 이후엔 어디에서도, 단 한 번도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을까? 혹시 이것은 누군가의 음모가 아닐까? 이 모든 것이 내가 저지른 과오 때문이라는 결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누군가의 집요한 악의가,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잘 나가고 있던 내 삶의 행로를 슬쩍 뒤틀어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p.191
- 막상 그런 질문을 받자 할말이 없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랫동안 그런 문제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린 학생들은 때로 어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을 품었다. -p.206
- 그러나,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그는 운명을 잊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p.221
- "내가 알기론, 무지가 인류에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어. 무지는 모든 무의미한 폭력의 원천이었다구." -p.308
- 그런데 하나의 절차가 다른 하나의 절차를 물고 들어갔다. 작은 결정이 또다른 작은 결정으로 이어졌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p.347
- "잘 들어봐.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돼. 나한테도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있었어. 그 선택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거야. ... -p.382
- 악몽은 기영에게 오래 기른 늙은 개 같은 존재였다. 그를 대신하여 짖어주었고 그를 대신하여 앓아주었다. 떼어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늘 함께 다닐 수도 없는...... -p.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