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2017.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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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 시화호에서 새들을 보면서 너를 생각했어. 너의 생명을 흐르는 시간과 나의 생명을 흐르는 시간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만나는 것인지, 섞이는 것인지를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화폭에 그려보려는 생각을 했어. 새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 박상희의 목소리는 늘 비음(鼻音)이 섞여 있었다. '휴가 나왔니?'라고 말할 때 '니?'가 코 속에서 울렸다. 코 속이 아니라, 몸속의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니?'는 말하는 사람의 몸속을 통과해 나온 물기로 젖어 있었다. 박상희의 '니?'를 그림으로 그리자면 물 위에 번지는 동심원(同心圓)이 되겠지. 그 동그란 파문이 전화선을 타고 와서 마차세의 귀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왔다. '니?'는 동부전선 산악 고지와 서울 간의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어서 마차세를 '니?' 앞으로 몰아세웠다.
- 초병들은 찬 안개를 마시면서 안개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안개는 안과 밖이 없고 앞과 뒤가 없어서 안개 속에서 초병들은 자신의 위치를 식별할 수 없었다. 철책선과 적 GP들이 지워졌다. 가늠구멍 안에 안개가 가득 차서 초병들은 아무 곳도 조준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안개가 갈라지는 새벽에 먼 고지의 윤곽이 어둠 속을 흘러갔다.
- 마차세는 산악고지의 봄 안개와 피라미의 죽음을 박상희에게 편지로 말하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다. 안개는 글로 잡히는 것이 아니었고, 피라미의 죽음은 글로 쓰기에는 너무나 사소했다.
- 요즘, 꽃 핀 벚나무를 그리고 있는데, 그림 속에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기가 힘들어. 핀 꽃이 아니라 피어오는 꽃, 피어있는 꽃을 그리고 싶어. 그걸 그리자면 밑그림이 없이 바로 붓질을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 너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밑그림 없는 세상을 생각했어. 꽃 핀 나무를 그리면서, 니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어. 꽃 핀 나무를 들여다보는 니 얼굴, 니 얼굴에 살아 있는 시간을 그리고 싶었어. 밑그림 없이 말이야.
- 잿물을 풀고 막대기로 저으면 핏물이 우러나왔다. 산악 부대의 피와 해안 부대의 피, 중공군의 피와 인민군의 피, 국군의 피와 학도병의 피, 상등병의 피와 대위의 피가 섞였다. 핏물에서 비린내가 났다.
- 웨이터가 다금바리리구이를 가져왔다. 다금바리 등에 보랏빛 윤기가 흘렀다. 마장세는 나이프로 아가미를 벌렸다. 분홍색 빗살이 드러났고, 빗살 사이의 깊이가 어두워 보였다. 고요한 아가미였다.
- 사람들은 난을 피하려고 피난지로 몰려왔지만 세상의 모든 환란은 피난지로 몰려들었다.
- 마장세가 훈장을 받던 날 어머니의 편지가 도착했다. 어머니의 글씨는 가나다라를 겨우 엮어가면서 비틀거렸는데, 혈연으로부터 달아나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워주었다.
-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니까 무서운 거겠지. 우리 형제는 모두 어버지 닮았어.
- 어둠에 파도 소리가 스몄다. 파도가 절벽을 때리고 깨질 때 푸른 인광이 일었다. 파도가 들어올 때, 소리는 어둠을 뒤덮으면서 밀려왔고, 파도가 물러설 때 소리는 어둠 너머로 밀려 나갔다. 들어오는 소리는 가득 찼고, 나가는 소리는 비어 있었는데, 발생 이전의 소리처럼 음정(音程)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 박상희는 마차세의 그 막막함과 서두름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세상을 멀리 빙 돌아서 다가오는 사랑의 우원한 회로를 마체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때 마차세는 결혼이 그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박상희는 생활을 구성하는 온갖 작고 하찮은 것들이 쌓여서, 그것들이 서로 인연을 이루고 질감을 빚어내서 마차세의 시간을 메워주기를 바랐다.
- 박상희는 아이들이 손바닥으로 느끼는 소나무 껍질의 느낌이 아이들의 마음에 깊이 저장되어 있다가 종이 위에서 선이나 색으로 드러나기를 바랐다. 느낌의 내용을 말로 타인에게 전해 줄 수는 없었고 느낌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이 교사의 일이라고 박상희는 생각했다.
- 사물을 손으로 주무르고 거기에 몸을 비비지 않고서는 종이 위에 선을 그을 수 없다는 것을 박상희는 남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고 왜 그런지를 자신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 박상희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의 질감이 마차세의 마음속에 쟁여지기를 바랐다.
- 몸속을 덮은 안개 속에서 해독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수런거리면서 이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발생하지 못한 세포들이 숨 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우주공간을 날아가는 별들의 소리 같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 말이 되어지지 않은 소리였다.